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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과 西의 기원

by 뿌리를찾아서 202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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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려 거란 전쟁'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오랜만에 조선을 벗어난 대하극이라 신선함이 느껴진다. 어느 순간부터 사극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가 사라지고 조선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고려가 조명받는 것을 보니 마음속이 후련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고려의 영토'이다. 보통 교과서에 고려의 영토는 신의주 근방에서 선을 수평방향으로 그어 동해안에 닿는 모양이다. 이 영토를 고안해 낸 당사자들은 모든 것을 축소시키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이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 고대사 전체를 축소시켜 놓아, 무엇이 진실인지 이제는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모든 걸 축소시키는데 타고난 역량을 가진 일본인들(예외적으로 자국의 역사는 부풀리는데 탁월하다)이 아주 교묘하게 우리 역사를 삼류 소설로 둔갑시키고 대륙을 지배한 영토 자체를 지워버려, 자존감은커녕 그런 역사가 있었는지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 부문이 일본이 노린 거대한 프로젝트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 놓은 그 프로젝트가 아직도 가동 중이며, 한 술 더 떠서 그들은 조선의 실학자 일부가 중화사상에 젖어 주장한 내용(실제 사료 및 증거가 없는)을 버젓이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고 들이밀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허위 주장을 해방 이후 주류 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더 황당한 것은 그들은 보다 더 일본 및 중국의 관점에서 역사를 가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치 16세기 프랑스 시인이자 천문학자인 '노스트라다무스'가 말한 예언서가 전 세계 역사서에 증거로 채택된 것이나 다름없는 짓을 부끄러움 없이 자행하고 있다. 

 

한국에서 역사(특히 조선 이전의 역사)에 대해 논할 때는 좌/우, 진보/수구가 다 한 목소리를 낸다. 좌/진보에 있는 사람들은 중화주의 사상(리영희 씨가 지은 전환시대의 논리_모택동의 문화 대혁명을 찬양함_때문일 것이다)에 젖어 있고, 우/수구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에 의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비롯된 오류 하나가 '고려의 영토'다. 좌우할 것 없이 그들은 역사문제에 있어서는 둘도 없는 동지들이다.  

 

이런 오류를 낱낱이 지적한 책이 '조성훈이 지은 韓上古史(한상고사)'이다. 그는 행정고시를 합격하고 재경직, 헌법재판소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고 현재 순천향대학교에서 글로벌한류학과 박사과정에 있다. 그의 책에서 '고려 영토'가 무엇이 문제인지 찾을 수 있다. 또한 한자 西(서)의 기원을 찾는 자그마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는 고려사 김부식 열전, 고려사절요를 인용하여 고려 서경이 현재 평양이 아니라고 증명한다. 단순히 생각해도 개경 북쪽에 있는 평양은 북경이고 서경이 될 수 없는데, 우리는 그냥 일본 및 중화, 일본에 길들여진 역사학자들에게 세뇌를 당한 것이다. 사기꾼들에게 사기당한 것과 다름이 없다.

 

김부식은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출발한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 "모든 군사를 이끌고 연주로 길을 잡아 안북대호부에 이르니 진숙과 이주연 등이 동계로부터 와서 모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가 현재 우리가 배우는 고려 영토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가감 없이 지적한다. 밑에 그림은 우리 정통(?) 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안북대호 부를 표시한 지도이다.

평안북도 안주시 지도
구글지도에서 본 안북대도호부

평양 밑에 개경(현재의 개성이 있지만 표시 안됨)이 있다. 개경에서 출발한 김부식과 그 일파들이 묘청을 치기 위해 안북대호부에 모였는데, 김부식은 그 당시 우리가 모르는 공수부대 및 비행기를 가지고 있었다.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안주시'를 안북대호부로 본다. 즉, 김부식은 평양일대에 묘청의 세력을 피해 공수부대를 동원해 평양을 치지 않고 평양 후방을 친 것이다. 

 

적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과감히 공수부대를 동원하였고, 병력을 실어 나를 비행기를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가서 가져왔다. 이래서 우리 역사는 소설이다. 주인공은 우리지만 지은이는 일본 및 중국, 그리고 조선의 일부 사대부들이다. 그 소설을 다시 리메이크하여 어리석은 국민에게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정통? 역사학자들이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평양을 우회에서 후방인 안주에 모여 묘청을 치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개경에 묘청을 막을 만한 세력을 남겨두고 평양을 한참을 돌아 안주에 모이는 전략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런데 '동계'라는 말에 주목하면, 그 논리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동계(강원도 삼척에서 함경남도에 이르는 지역)는 평양을 우회할 때 가까운 곳이다. 굳이 '안주'에 모일 필요가 없다. 동계도 소설일 수 있지만 그들의 논리를 최대한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모순이다. 평양을 우회할 때 가장 가까운 곳이 동계인데 왜 안주로 가는가? 이리가도 소설이고, 저리가도 소설이다.  한국민속문화 대백과사전,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자랑스럽게 이런 소설이 쓰여 있다. 주 공격 부대를 몰고 간 김부식이 개경에 아무리 방어병력을 남겼다 하더라도 반대로 묘청이 개경으로 남진하면 쉽게 개경이 함락되는 빌미를 주는데 가능한 일이겠는가? 이 모순을 조성훈씨가 한상고사에 남기고 있다.

 

그는 고려 서경을 현재 중국 요양시로 보고 있다.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서북쪽으로 100km 지점에 위치한다. 그래야 고려사 김부식 열전 기사 내용이 맞게 된다. 서경을 점령하기 위해서 김부식이 1년을 소비하였기에 개경을 적에게 남겨둔 채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병력을 실어 날랐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고려의 서경을 현재의 중국 북경으로 보기도 한다.

 

역사적인 문제를 넘어서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한자 西의 방향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西는 해가 지는 방향이자, 東과 반대되는 방향이다. 南과 반대되는 방향이 아니다. 西의 기원은 東(기존 글에서 이미 기원을 설명)과 그 기원이 같다. 東도 자루에서 나왔듯이 西도 자루를 지칭한 우리말에서 나왔다.

西의 갑골문자
자루로 설명한 西의 기원

 

위의 그림은 西의 갑골문자로 3천6백여 년 전에 쓰이던 문자다. 하지만 이 글자를 서쪽 방향을 뜻하기 위해 만들지 않았다. 원래의 뜻은 '자루'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직관적으로 보아도 실로 이어 만든 '자루형태'이다. 실제 이 글자는 자루였고 이 글자에 붙여진 소리가 '해가 지는 방향'을 표현한 소리와 같아 차용되었다. 이래서 東과 그 어원의 성격이 같다.

 

서양에서는 이 글자를 두고 '새의 보금자리'를 들어 해가 지는 쪽에 자리를 틀어 서쪽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는 둥 여러 의견이 있다. 당연히 여러 의견이 모일 수밖에 없다. 이 글자의 3천6백 년 전 소리가 'sɯːl'이기 때문이다. 연유도 기원도 배경도 그들에게는 오리무중이다. 

 

분명 그들이 밝히기를 실로 이은 '자루'인데 왜 서쪽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한국어에는 '술'(sul)', 수울'suwul' 등이 있다. '수울'은 옛말이다. 뜻은 "끈, 띠, 책상보, 옷 따위에 장식으로 다는 여러 가닥의 실, 대나무로 만든 채" 등이다. 갑골문자가 태어날 때 뜻하였던 '실로 만든 자루'의 원형을 고스란히 아직 간직하고 있다. 'sɯːl'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술(슬), 수을'과 같다. 이를 밝힌 학자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 사람 '정창'이다.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우리말 기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 이 단어가 왜 서쪽을 뜻하게 되었을까? 이 답도 한국어 '슬다'에 있다. "해가 솟다"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말은 "해가 지다"지만, '슬다'라는 표현을 써도 된다. 물론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슬다'의 뜻이 '사라지다'이기 때문에 '솟다'와 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말이다. 구체적인 뜻은 "형체나 현상 따위가 차차 희미해지면서 없어지다"로 '해'가 서쪽으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담은 수채화 같은 느낌의 단어다.

 

갑골문자가 태어나던 시기 이미 한국어가 통용되었고 '슬다'의 어근 '슬'은 해가 지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였다. 물론 '슬'을 담은 문자가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자루를 뜻하는 '수울, 술'과 혼용되면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결론은 자루를 뜻하는 '술, 수울'이 '슬'과 소리가 같아 혼용될 수밖에 없던 사실이다.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한국어밖에 없다.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에서 석회암 동굴을 가장 많이 보유한 지역이다. 구석기 시대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안식처인 동굴이었고, 신석기시대로 넘어오면서 그들은 한반도에서 중국 동쪽, 요동,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초원으로 이동하였다. 그 시기에 한민족이 형성된 것이다. 결국 중국 동부부터 연해주, 시베리아 초원까지 우리의 터전이었다. 

 

가장 농경을 빨리 시작한 민족도 우리다. 충주 소호리 볍씨는 재배벼로 1만 5천 년 전 기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제대로 가리키지 않지만, 탄소연대측정법을 부인할 수는 없다. 東西의 기원이 '자루'에서 나온 연유이기도 하다. 농경에서 중요한 도구 중에 하나가 자루이며, 담아야 할 도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 동서 방향 모두 자루에서 나온 것은 필히 농경과 관련이 있다. 즉 해가 솟고 지는 방향, 자루의 어원은 갑골문자 이전에 같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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