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le의 6천 년 전 소리는 Kwalo였고, '고래'에서 나왔다.
바다에 사는 가장 큰 어류는 무엇일까? 순식간에 떠오르는 대답은 고래일 수 있다. 듣는 상대방도 이상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금방 답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고래는 어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류,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등등 동물들을 구분 짓는 기준을 배웠다.
한편 옛날 사람들은 고래를 뭐라고 불렀을까? 사뭇 궁금해 질 수 있다. 혹시 설마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고래'라는 소리가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다."라고 생각했다면 사실 맞는 말이다. 이유는 고래잡이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한 사람들이 우리 선조들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위에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그린 사람들이다. 대략 7천 년에서 9천 년 전에 그려진 이 암각화는 고래를 그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의 기록물이다.
당연히 그 당시 울주에 살던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다. 처음 고래 잡이를 한 사람들은 바로 우리에게 그들의 유전자를 나눠준 선사 시대 사람들이다. 그럼 고래를 그 시대에는 뭐라고 불렀을까?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고래와 비슷한 말을 사용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증명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행히 간접적 증거가 있고 영어 단어 'whale'이다. 단지 현재 영어 발음 ‘웨일'로는 '고래’와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 전에 우선 영어의 어원은 보통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고 생각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서양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뿌리 언어가 라틴어, 그리스어가 아니라 ‘인도유럽어’ 라고 믿고 있다. 그냥 근거 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부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인도유럽어는 6~8천 년 전에 현재 카프카스산맥 위에 있는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 남부 초원 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이다. 많은 서양 언어들의 뿌리가 인도유럽어다. 영어, 라틴어,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란어, 힌디어 등등의 출발점이 같다.
서양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whale의 인도유럽어 소리는 'kwalo'다. 그 당시에 영어 알파벳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서양 언어의 뿌리로 밝힌 소리를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말 고래 소리를 영어로 음역 하면'kolae'가 된다. whale은 k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6~8천 년 전의 kwalo 와 7~9천 년 전의 고래 korae소리는 언뜻 보아서 똑같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연결고리가 있다. ‘고’의 소리는 ko이지만 kwalo의 'kwa'와 멀지 않다. 마찬가지로 lae도 kwalo의 lo와 가까운 소리다. 그럼 어느 소리가 먼저일까?
고래 암각화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새긴 울주에 살던 신석기인들이 사용한 소리, ‘고래’가 처음이다. 참고로 울주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고래 암각화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 고래가 그 시대에 쓰였는지, 의문이 든다면 역으로 kwalo를 보면 된다. 아쉽게도 우리말의 기록은 15세기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는 밝힐 수 없다. 그러나 서양 학자들이 오히려 우리말 고래가 수천 년을 이어져 사용되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kwalo'의 소리가 최초의 고래 암각화가 발견된 지역의 말소리와 '고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처음 고래잡이를 한 사람들이 바다의 큰 동물을 보고 이름 지은 소리가 당연히 먼저이기 때문이다. 울주에 있던 선조들은 북으로 이동하여 거대한 바이칼호를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걸어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이 이 영어의 뿌리가 나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초원지대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그림이 있는 곳, 그리고 ‘고래’라는 소리를 간직하고 아직도 말하고 있는 나라, 과연 이 보다 더 정확하게 뿌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조건이 어디 더 있을까? 고래kolae가 과로 kwalo로 변해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잠깐 여기서 명심해야 되는 것은 우리는 지금 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소리는 구전된다. 그래서 한글은 15세기에 창제되었는데, 수천 년 전의 말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하나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천 년을 이어온 소리를 15세기 한글의 발명으로 기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말소리를 아직 우리가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록이 늦었어도 그 소리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의태어(mimetic word), 의성어(onomatopoeia)를 가지고 있고, 자음이나 모음 소리의 변화가 심해도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한국어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의심은 필요가 없다.
한국어에서 고래는 비유적으로 ‘큰’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크다’의 뜻을 포함한다. 영어에도 '크다, 많다'라는 표현에 whale을 사용한다. 'a whale on reading'(굉장한 독서광), a whale of a good time(굉장히 즐거운 시간) 등으로 ‘많다, 크다’라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만약 세계 최초로 고래를 새긴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없었다면, 고래라는 소리가 인도유럽어 kwalo의 뿌리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어진다. 그렇기에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잠기는 일이 반복되어 거의 이제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말 고래를 남긴 고대의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고 문화재 관리의 허술함이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방문해서 현지에서 자원 봉사자로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설명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반구대 암각화를 그린 사람들은 울주에 원래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러시아 오호츠크해 옆의 캼차카반도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이는 그분의 의견이 아니라, 일부 우리나라 역사학자의 의견을 받아 지방정부 관광부서에서 만든 지침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지침이 사실이라면, 캼차카반도에 고래를 잡는 암각화가 있어야 하나, 현실은 그곳에 암각화는 없다. 그리고2009년에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고래를 연구한 김장근 박사는 반대로 울진에서 출발한 선조들이 “고래 잡이를 위해 연해주,다시 쿠릴열도를 거쳐 러시아 캄차카반도, 이어서 알류샨열도를 지나서 미국 북부의 알래스카로 갔다.” 고 이야기하였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학설이 있는데, 2007년 미국의 고고학회지에 실린 내용이다. 그 내용은 “미국 알래스카의 알류샨 열도 '아막낙' 섬에서 3천년 전의 한국 전통온돌이 발견됐다,”라는 것이다.
역사적 문화유산이 뜻하는 내용을 사실대로 해석해야 되는데, 반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우리 역사학계는 집단차각에 걸린지 오래되었다. '토드 로즈'가 지은 Collectigve Illusions(집단 착각)에 나온 이야기 중에 우리 역사학계를 비판할 구절이 나온다. "집단 착각에 걸리면, 진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집단 구성원의 동의가 더 중요하다." 조선을 거쳐 일제 식민지,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진실은 '집단 착각'의 커다란 그림자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좀더 김장근 박사의 발표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면, 앞서 설명한 우리 선조들이 바이칼 호수를 거쳐 영어의 발상지인 러시아,우크라이나 남부 초원지대를 거쳐 스칸디나비아로 갔다는 것을 간접 증명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노르웨이에 고래를 그린 암각화가(알타 피요르에 있음)있는데, 시기는 기원전 4200~500년 사이로 간주되어 울주 반구대 암각화보다는 뒤진 시기다. 참고로 러시아의 암각화 학자 니콜라이 보코벤코 박사는 “(반구대 암각화는)한국의 삼성브랜드와도 맞먹는 가치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위대한 문화 유산은 물에 잠기기를 반복하여 구멍가게에 있는 사탕 봉지처럼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그의 말을 빗대면 삼성이 구멍가게 사탕봉지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울주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이동하는 중에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결국 또 다른 고래잡이 터전인 스칸디나비아로 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필연적인 숙명과도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이동은 생존의 몸부림이며, 기후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서 당연한 몸의 반응이었다.
예를 들어 지금은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지역별로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즉흥적이고, 직관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비가 며칠만 오거나, 눈이 잠시 내려도 위협을 느껴 정주했던 지역을 떠나 계속 이동을 하였다. 즉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이동의 원동력이었다. 이동 기간은 수백 년이 걸렸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동할 수밖에 없던 현실이다.우리 선조들도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영어의 발상지로 인도한 것이며, 우리말 소리도 같이 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