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R, 커(KEO), 기르(KIR) — 세 글자를 나란히 놓으면 보이는 것
영어 create(창조하다), crescent(초승달), croissant(크루아상), increase(증가하다), recruit(신병)… 이 단어들은 모두 인도유럽조어(PIE)의 한 뿌리에서 나왔다. *KER-, 뜻은 단 하나 — "자라다".
이제 그 옆에 우리말 두 낱말의 어근을 나란히 놓아 보자.
*KER — 자라다 (인도유럽조어 재구형)
커 KEO — 커지다 (자라다)
기르 KIR — 기르다 (자라게 하다)
KER : KEO : KIR. 자음 뼈대도, 뜻도 그대로다.
Ⅰ. *KER("자라다")가 낳은 서양 단어들
라틴 crescere("솟아나다·자라다·불어나다"), creare("낳다·만들어 내다"), procerus("키 큰·길쭉한")가 여기서 나왔고, 거기서 다시 이 모두가 갈라졌다.
- create · creature — 피조물은 "자라난 것"
- crescent — 초승달 = "자라고 있는 것"(차오르는 달)
- 🥐 croissant — crescent와 완전히 같은 단어 ("자라는 달")
- increase(안으로 자람) ↔ decrease · crescendo(소리가 커짐)
- concrete("함께 자라 굳은 것") · cereal·Ceres(자라는 곡식과 그 여신)
- 🌱 recruit — "새로 돋아난 것", 신병은 어원상 새싹
- sincere — "한 번에 자란(섞이지 않은)" → 순수한
- procerity — "키 큼·훤칠함" (procerus에서)
- Kore / kouros — 그리스어 소녀·소년 = "자라는 이"
⚠️ 이 ***KER-("자라다")*는 앞서 다룬 *KER-("뿔·머리": horn·carrot·cornea)와 번호로 구분되는 별개의 뿌리다.
Ⅱ. 첫 번째 계열 — 크(KEU) · 커(KEO) · 키(KI)
- 크다 KEU — 크다, 자라다 ("아이가 몰라보게 컸다")
- 커지다 KEO — 점점 크게 되다
- 키우다 KI — 크게 자라게 하다 (크다의 사동사)
- 키 KI — 자란 높이
여기서 KER의 끝소리 -R은 닳아 없어졌다. KER → KEO.
Ⅲ. 두 번째 계열 — 기르(KIR) · 길(KIL) · 길이(KIL-I)
그런데 한국어는 같은 뿌리를 한 번 더 갖고 있다. 그리고 이쪽에는 -R이 살아 있다.
- 기르다 KIR — 길게 자라게 하다, 기르다 ("머리카락을 기르다", "동식물을 길러 자라게 하다")
- 길다 KIL — 길다 · 길이 KIL-I — 길이
국립국어원과 원어민 용법이 한결같이 갈라놓는 선이 있다.
- 기르다(KIR) ← 길다(KIL) → 길이를 자라게 (손톱을 길렀다 ⭕)
- 키우다(KI) ← 크다(KEU) → 크기를 자라게 (손톱을 키웠다 ❌ / 덩치를 키우다 ⭕)
길이는 기르고, 크기는 키운다.
Ⅳ. 세 글자를 나란히 놓으면
| *KER (재구형) | K – R | 자라다 |
| 기르 KIR (한국어) | K – R | 자라게 하다 |
| 커 KEO (한국어) | K – (r 소실) | 자라다 |
**KER와 KIR은 모음 하나 차이일 뿐, 자음 뼈대 K–R이 완전히 같고 뜻도 같다. (초성은 무성/유성 차이뿐 — 이 책 표기로 K(G).) 그리고 KEO는 그 -R이 닳아 없어진 같은 뿌리의 다른 상태다.
즉 한국어는 이 뿌리를 닳은 형태(KEO)와 온전한 형태(KIR) 두 벌로 동시에 간직하고 있다.
Ⅴ. 구조도 두 겹으로 겹친다
| 라틴 | crescere | creare → create | procerus/procerity |
| 한국어 ① | 크다 KEU · 커지다 KEO | 키우다 KI | 키 KI(높이) |
| 한국어 ② | 길다 KIL | 기르다 KIR | 길이 KIL-I |
라틴어가 crescere : creare 한 번 나눈 자리를, 한국어는 두 번 나눴다. 게다가 라틴 procerus가 "키 큰 + 길쭉한"을 한 단어에 담았듯, 한국어도 **키(크기)와 길이(길이)**를 같은 뿌리에 나란히 세웠다. **"자람 = 커짐 + 길어짐"**이라는 감각이 두 언어에서 동일하다.
Ⅵ. 그래서, 뿌리 자리에 설 수 있다
KER는 재구음이다. 아무도 발음한 적 없는, 이론 속의 소리다. 그러나 한국인은 아무것도 재구하지 않고 오늘도 아이가 크고(KEU), 나무를 기르고(KIR), **키(KI)**를 재고, 머리를 길게(KIL) 기른다. 이 뿌리는 발굴된 게 아니라, 입 안에 살아 있다.
그렇다면 물음은 세 겹이다. 만약 한국어가 이 소리를 빌린 것이라면 —
- 왜 낱말 하나가 아니라 체계 전체(자동사·사동사·명사)가 들어왔는가?
- 왜 하나가 아니라 두 벌(KEO 계열, KIR 계열)로 들어왔는가?
- 왜 서양에서 닳아 없어진 -R이, 빌린 쪽인 한국어의 KIR에 더 온전히 남아 있는가?
차용어는 맨 소리 하나로 온다. 파생 구조를 배선한 채, 두 겹으로, 심지어 원형에 더 가까운 형태로 오지 않는다.
이 책의 제안은 그래서 이렇다. *KER("자라다")는 어느 한 어족의 재산이 아니다. 그것은 더 오래고 더 넓은 유라시아 조어의 파편이며, 인도유럽어는 그것을 create·crescent·increase로 흩뿌린 반면, 한국어는 커(KEO)와 기르(KIR)라는 두 벌의 온전한 체계로 붙들고 있다. 흩어진 조각들이 갈라져 나온 그 뿌리 자리에, 한국어가 서 있다.
정직한 경계: 영어 create·crescent·increase·recruit가 PIE *KER-("자라다")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크다·커지다·키우다·키·기르다·길다·길이가 위의 뜻을 지닌다는 것은 검증된 사실이다. 한국어 어근 **커(KEO)/기르(KIR)**를 *KER와 동일시하는 것, 그리고 한국어를 선(先)인도유럽 유라시아 뿌리의 자리로 읽는 것은 닫힌 증명이 아니라 열린 물음이다.
다만, 한 반구의 가장 깊은 과거에서 복원된 *KER가, 한반도의 부모가 오늘도 아이를 보며 하는 말 — "많이 컸네(KEO)", "잘 길렀다(KIR)" — 와 겹칠 때, 정직한 물음은 더 이상 "한국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았는가"가 아니다. "과연 받은 적이 있기는 한가, 아니면 이곳에서만은 한 번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았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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