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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은 漢字인가? 韓字인가?

by 뿌리를찾아서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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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漢子라는 이름은 왜 생겨났나?

보통 漢子는 중국의 문자로 알고 있고, 중국 고대 국가인 漢나라 문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이다. 漢子의 원류는 갑골문자다. 1899년 청조 말기에 안양현 소둔촌, 은(殷) 나라의 폐허에서 왕의영(王懿榮)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발견하였다. 그 당시는 단순히 한약재로 쓰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15만 점이 발견되었으며, 해독한 수는 4천 자 정도다. 아래 그림은 거북이 배에 새겨진 갑골문의 표본이다.

거북 배에 쓰여진 갑골문자
귀갑에 쓰여진 갑골문자

 

결코 한자가 漢나라의 전유물이 아니며, 오히려 殷子라 해야 맞다. 은(殷) 나라는 중국인들이 조상이라고 여기는 화하(華夏)족이 아니다. 일본학자 '시라가와 시즈카'가 지은 [한자의 기원]에서 그는 "殷나라는 周나라에게 멸망당한 후 동방으로 돌아갔다"라고 적고 있다. 은의 터전인 안양현에서 동방이면 공자(孔子)가 말한 군자들이 사는 나라, 즉 九夷족 국가들이 있던 곳이고, 바로 윗쪽은 孤竹國(고죽국)이었다. 왜 돌아갔겠는가? 이는 마치 그들을 받아 줄 강력한 국가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중국의 여러 사료에 고구려도 고죽국에서 나왔다는 기사가 많다. 그중에 구당서에 보면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이다."라고 적혀있다. 또한 고죽국은 '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살던 나라다. 더불어 '산해경'(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지)에 보면 "(고)조선은 발해의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라는 기사가 있고, 고죽국은 발해의 모퉁이에 있었다. 모퉁이란 말이 거슬릴지 모르지만, 사실을 말하는 기사이니 넘어가자.

 

종합해 보면, 고조선은 고죽국과 연계되고 고죽국은 고구려의 전신이 된다. 즉, 殷나라가 망한 후 周나라를 섬기기 싫어 산속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먹다가 생애를 마친 '백이숙제'는 중국인들의 조상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周나라는 원래 殷나라가 통치하던 산시 성 서북쪽 자그마한 나라였다. 결과적으로 고죽국은 殷나라의 또 다른 제후국이었고, 周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참고로 殷이 멸망한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종족은 강족(羌族)이었다. 그들은 周를 도와 殷을 무너트렸다. 殷에서는 인신공양을 많이 하였는데, 강족이 대부분 희생자들이었기에 周를 도왔다. 강족은 현재 티베트인들의 조상들로 여겨지는 민족이다. 

 

고려 중기 및 조선 시대 신과 같은 존재로 부각된 '기자(箕子)'도 殷나라 사람이었다. 周가 들어서고 나서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는 중국 사서의 기록이 있는데, 그 지역은 현재 하북성 노룡현이었다. 산해경에서 말한 발해에서 내륙으로 인접한 조선의 영역이었다. 반면 조선의 사대사상으로 인해 '기자'가 미개한 한민족을 개화시켰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조선의 실학자 일부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기자가 봉해진 지역을 발해 근처 하북성 노룡현이 아니라 현재 북한의 평양으로 비정하여 지금까지 성경의 바이블처럼 믿고 있다. 이는 일제 식민지를 거쳐 더더욱 공고히 해졌고, 일본의 '사사가와 재단'의 돈을 받아 연구한 학자들 및 중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조국(?)을 위해 작업하는 동북아 역사 재단의 일부 학자들이 선봉에 서서 아직도 고조선의 역사 및 전체 한국사를 축소하고 있다.  

 

고조선 서북 변경과 殷의 동북 강역이 겹치는 곳이 고죽국이었고, 그 일대는 전부 동이족이 각각의 나라를 세워 운영하던 지역이었다. 고대사학자 심백강 선생이 저술한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를 읽어 보면 마음속에 커다란 울림이 생긴다. 그리고 상기에서 설명한 내용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시라가와 시즈카'가 암시를 한 것처럼 殷나라, 고조선은 그 당시 같이 존속하고 있었으며, 다 같이 東夷족이었다. 그렇기에 殷이 멸망 후에 동방으로 돌아갔다"라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인이고 결코 한국에 이로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로 인해 고조선이라는 명칭은 쓰지 않고 동방이라는 말로 대체했다.    

 

여러모로 보아도 殷나라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갑골문자가 漢자의 기원인데, 漢子로 쓰는 것은 그 기원을 무시하는 꼴이다. 東夷子 또는 한민족의 韓子가 되어야 한다. 

2. 먹을 食이 왜 韓字인지 알아보자

인류의 역사는 생존의 역사다. 생존을 위해서 많은 것을 발명하였고, 그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언어다.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 보다 신체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존속할 수 있는 것은 언어의 영향이 컸다. 영국의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의 [언어의 역사]에서 그는 한 가지를 단언하고 있다. "기원전 10만 년 경 혹은 그 보다 약간 이른 시점부터 말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기원전 8000년 이전부터 말이 시작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가 단언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이유는 농경의 시작과 때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8000년 전 인류가 농경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인류는 이미 의사소통의 성장단계에 돌입했어야 한다. 무계획적인 수렵 채집에서 벗어난 인류이기에 체계적인 협업이 이뤄져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의사소통 말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생존을 생각해 보면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먹어야 생존할 수 있기에 '먹다'라는 동사가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행위이자 소통이었다. 같이 먹던가, 혼자 먹던가 어쨌든 먹어야 했다.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 언제 먹을지, 같이 먹을지, 따로 먹을지, 고기를 먹을지, 물고기를 먹을지 등등 소통의 차원에서 '먹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활의 일부였다.

 

기록으로 남긴 '먹다'의 모습은 의외로 갑골문자에 있다. 아래가 그 모습이다. 맨 위 A자 모양은 입을 묘하한 것이고, 아래는 밥공기에 밥이 있는 것이다. 농경의 이득으로 쌀을 수확하면서 밥을 지었고, 밥공기 위에 입을 얹어놓으면서 '먹다'를 표현하였다.

 

食의 갑골문자
밥으로 표현한 食의 갑골문자

상당히 함축적이고 사실을 묘사하는 그림으로 '먹다'를 표현했다. 3천 6백 년 전에 이런 그림으로 '먹다'를 표현했음은 가히 예술가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이 문자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견이 있다. 하나는 'mə-lək'이고 다른 하나는 'hljɯɡ'이다. 앞에 것은 서양학자들이, 뒤에 것은 중국 사회과학원 정창이라는 학자가 밝힌 것이다. wiktionary에 가서 확인하면 자세한 근거가 나온다.

 

'mə-lək'은 '머럭'소리고, 'hljɯɡ'은 '흐륵' 소리다. 잠깐 5초만 이 소리들을 입에 머금고 있어보자. 당연히 떠오르는 단어는 '먹'과 '후르륵' 등이다. 우리말 소리 '먹다'의 어근 '먹'과 국수를 먹거나 액체를 먹을 때 나는 소리 '후르륵'이다. 100%같지 않다고 틀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계속 소리를 내보자. 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우리말 소리가 핵심소리라는 것을 잎으로 뱉을 때마다 알수가 있다. 

 

3천 6백 년 전 이 글자가 생겨날 시기 이전에 이미 '먹'과 '후르륵'은 존재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갑자기 이 문자에 소리를 붙일 수가 없다. 이미지를 형상화 한 후 소리를 붙인 다는 것보다는 원래 있는 의사소통의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를 형상화 했다는 논리가 맞지 때문이다.

 

파리 전기 통시 그랑제콜 교수인 '장 루이 데살'의 [말의 자연사]에 이런 귀절이 나온다. 언어학자 '촘스키'가 '칼 포퍼'를 비판한 내용인데, 간략한 내용은 하기와 같다.

 

1. 언어의 진화는 여러단계를 거쳤고, 감정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소리가 사용되는 원시 단계

2.생각을 표헌하기 위한 분절된 음을 사용하는 발전 단계

 

위의 두 가지가 '칼 포퍼'가 주장한 내용인데, 촘스키는 "이 두 단계가 연속성이 없고 '칼 포퍼'가 그 어떠한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않아 원시단계에서 발전단계로 진화적 발달을 가정할 이유가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촘스키가 틀렸다. 한국어는 '칼 포퍼'의 의견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먹다'는 배고픔을 느끼고 난 뒤에 나오는 행위다. 즉, 배고프다는 느낌, 감정이 '먹다'의 행위를 이끈다. 스트레스를 받아 먹을 수 있고, 배고파서 먹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먹다'는 감정을 표현한 원시 단계의 소리다. 여기서 분절된 음이 나온다. 바로 '머금다'다. 머금다를 사전에서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1. 삼키지 않고 입 속에 넣고만 있다.

2.눈에 고인 눈물을 흘리지 않고 지니다.

3.생각이나 감정을 표정이나 태도에 조금 드러내다.

 

원시 단계에서 분절된 '머금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매개 수단이 된다. 바로 오스트리아 철학자 '칼 포퍼'가 이야기한 그대로 우리말 소리는 언어 진화 단계에 각각의 연결고리를 달고 있다. 촘스키가 한국어를 연구했었다면, 그런 비판 보다는 침묵을 하던가 '칼 포퍼'를 옹호해야 하는 입장에 섰을 것이라 느껴진다.

 

우리말은 원시적이면서 단계 단계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소리로 이뤄져 있어 뜻을 전달 할 때 소리의 진폭이 있어도 이해가 되는 언어다. 3천 6백 년 전 갑골문이 만들어지기 이전 그런 소리를 우리 선조들은 쓰고 있었다. 食의 수나라, 당나라 시대의 발음은 '직'에 가까웠다. '직'이 '식'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중국어 발음은 '츠'다. 

 

국립국어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질문] '붓'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답변] '붓'은 어원적으로 중국어 '筆'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筆'은 고대 중국에서는 '붇'과 비슷하게 발음이 되었고 이 말이 해당 물건과 함께 들어와 '붓'으로 굳어진 반면, '筆'의 한자음은 '필'로 정착해 다른 모습을 띠게 된 것입니다. 

 

황당하고 사대주의적 답변이다. 붓은 이미 殷나라 시대에 있었다. 갑골문을 새기기 위해 미리 붓으로 그려야 했고 그 뒤에 새김작업이 있었다. 그 당시 이미 우리말 소리 '붓'이 있었다고 봐야하는데, 秦나라 시대에 '몽염'이 개발하였다고 굳건히 믿고 있는 실정이 아쉽기만 하다. 

 

만약 '食'의 어원은 무엇인가요? 물었을 때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 이전에 아주 미개해서 '먹다'라는 동사가 없어 의사소통이 어려워 '먹'이라는 소리를 중국에서 차용했고, 식은 후에 수나라 당나라 시대 발음 '직'을 받아드려 차 후에 '식'이 되었습니다."로 답할 가능성이 많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먹다는 인류가 사용한 아주 기본적이고 오래된 의사소통 소리다. 이 소리가 3천 6백 년 전 갑골문 소리인데, 그 당시 유인원 정도 수준의 삶을 영위한 우리 조상들이 의사소통을 위해 '먹'을 차용했다고 가정한다면, 왜 우리는 중국에 완전 흡수가 되지 않았겠는가? 왜 아직까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달고 살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직도 우리는 '箕子'를 신봉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말을 뱉었을 때 우리나라 대통령 및 모든 정치인들 학자들은 침묵했다. 요즘 침묵한 그 대통령이 전두환 군사 구데타를 다룬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보고 "분노가 불의한 현실 바꿀 힘"이라고 강조하였는데, 왜 그 당시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기원전 8천 년 전에 이미 '먹'은 있었다. 그 소리를 쓰던 사람들은 유라시어의 공용어를 창조한 한국인들의 조상이었고 아직도 우리는 그 소리를 쓰고 있다. 국수주의적 자부심을 갖자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있는 사실을 보다 면밀히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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